「그레이스 리 커팅 클럽」대표 그레이스 리 <下>
「그레이스 리 커팅 클럽」대표 그레이스 리 <下>
  • 장업신문 master@jangup.com
  • 승인 1996.04.18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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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안 미용계에 신선한 새바람

72년 도큐호텔 미용실 - 78년 뉴욕에 한글간판 숍 오픈







폴 미첼에게 사사받은 그레이스 리는 71년 귀국해 72년 4월 도큐호텔에 미용실을 오픈했다. 첫 업소를 열자마자 많은 고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하루 24명까지 머리를 손질해 준 그는 하나의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손님이 너무 몰려, 앉아있는 사람의 얼굴이 이 얼굴 같고, 저 얼굴 같아 더 이상 디자인이 잡히지 않아 돌려 보낸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머리는 한번 자르면 다시 자라기 까지 6개윌이 걸리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선 「저 사람은 무당 신기가 올라야 되지 안오르면 안자른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특히 이 시기 그는 럭키의 스폰서로 도큐호텔 파노라마홀에서 헤어쇼를 성황리에 치러 그레이스리의 명성은 놀라울 정도로 커져갔다. 커트의 기본요령과 퍼머의 기법, 가정에서 할 수 있는 머리손질들의 내용으로 진행됐던 이 혜어쇼는 국내 최초로 열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때 잦은 미장원 출입을 삼가하고 손수 손질하는 방법을 권유해 당시의 미용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그 당시 그레이스 리는 다른 미용인들과는 좀 독특한 성향을 보였던게 사실이다. 많은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고객에게 건강한 모발을 유지하도록 해주고 가장 적합한 헤어디자인을 연출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단지 미용만을 생각하고 미용만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3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는 자기에게 맞는 머리손질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며 내추럴한 혜어스타일 연출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귀국후 미용계에 외국의 선진 미용기술과 이벤트를 선보여 많은 화제를 뿌렸던 그는 자연스럽게 고객들의 줄이 이어져 첫 업소인 도큐호텔의 미용실이 문전성시롤 이뤘다. 이어 단발의 집이란 상호로74년부터 77년까지 3개의 미용실을 더 오픈했다.



이들 미용실들은 고객타깃에 따라 분위기, 가격등을 차별화했다. 또 78년에는 국내 최초로 뉴욕 5번가에 한국어로 된 간판을 내건 지점을 확보했다.



76년에는 폴 미첼-그레이스 리 조인트 헤어쇼롤 했으며 미국 보그지에 최고의 혜어디자이너로 선정돼 작품을 게재하게 됐다.



뿐만아니라 77년 조선일보에 「미용상식의 허실」이란 컬럼을 연속 기고해 미용연구가로서의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또 소비자를 생각하는 그레이스리의 평소 가치관은 사회로의 관심으로 이어져 7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매년 꾸준하게 정박아 기금마련 행사를 해 주위의 귀계에 새바람을 불러넣었다. 헤어디자인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하고 커트의 중요성을 부각시켜 새로운 美개념을 세웠다. 그는 디자인의 요소로 얼굴형, 키, 허리, 가슴 등 전체적인 체형을 감안해야 하며 모질, 모류, 두상 등을 세부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 블로우 드라이 기법을 들여오는 등 외국의 선진 미용기구들을 속속 소개했다. 이처럼 그가 미용계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온 이유는 외국에서 공부하고 외국을 자유자재로 왕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같이 미용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석탑산업 훈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앞만 보고 달려온 탓인지 그레이스 리에게도 일에 대한 회의가 일기 시작했다. 숍을 제자들에게 맡기고 여행만 다녔으니 결국 운영이 어렵게 됐다. 그래서 1985년 기존의 지점들을 통합해 동숭동에 그레이스 빌딩을 짓고 그곳으로 옮겼다.



『일본 쿄토에 여행을 갔다가 손님을 위해 정성스럽게 음식을 하나하나 만드는 음식점주인을 보고 그에게서 내가 열정적으로 일했던 과거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레이스 리는 그로인해 침체기롤 극복하고 다시 일에 몰입하게 됐다.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이 그레이스 리 커텅클럽이다. 1990년에 발족한 미용인들만의 순수연구 모임인 커팅클럽은 보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기술과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미용실 운영 등 미용인의 고민들을 서로 머리를 맞대고 연구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 모임에서는 매년 헤어 패션의 세계적인 흐름과 유행의 경향을 파악해 우리만의 독창적인 유행을 제시하는 헤어컬렉션을 개최하고 작품집을 낸다. 또 본부에서 제공하는 교육지침서와 도해도를 통해 회원들이 직접 시술에참여 하는 스터디 그룹을 정기적으로 운영 하며 커트대회는 신진 미용인들의 등용문 역할을 하고 있다. 가입회원은 5년이상의 경력이 있어야 하며 현재 2백여명이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공부하는 미용인의 참모습을 이 그룹을 통해 교육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남은 인생을 미용 교육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현재 교육체계는 미용기술 세미나를 통한 눈으로 보는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현 미용교육 시스템을 개선해 자료를 취합하고 완벽한 보관으로 미용인들이 언제나 자료를 찾아 공부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 계획입니다. 또 그동안의 미용경력을 토대로 전무하다시피 한 국내 미용서적의 발간에도 신경을 쓸 예정입니다.』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교육에 대한 그레이스 리의 열의는 대단하다. 공부하는 미용인의 자세를 강조하는 그레이스 리. 그래서 그가 후배들에게 늘 강조하고 있는 것은 첫째도,둘째도 교육이다. 이것이 곧 참미용인의 자세라고 말한다.



다시 태어나도 미용인이 되겠다는 그레이스리. 미용인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때 부터 미용교육을 받고 성장해 무엇인가 제대로 해보겠다는 그의 말에서 미용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과 열정을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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