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해방과 더불어 創業-한국장업 50년 求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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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업신문 master@jangup.com
  • 승인 1994.11.1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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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 포마드 기반, 아모레로 정상 우뚝




우리나라 장업사중에서 1위이며 세계굴지의 장업사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하여 이젠 세계적인 화장품회사로 부상한 태평양.



기술과 자본이 전무였던시대, 우리민족의 최대 기쁨이요 영광이었던 8.15해방과 더불어 이땅에 태평양을 탄생시킨 창업주 서성환 회장!



서성환회장과 태평양을 분리해서 생각할수는 없다. 서성환회장의 성장과 발전, 애환과 기쁨이 곧 태평양의 성장과 발전, 애환과 기쁨이며 이는 창업주 서성환회장과 태평양이 함께한 지난 50년의 장구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전개되는 태평양의 역사가 바로 서성환회장의 역사이기도하다.



1924년 황해도 평산군 적암면 신답리(黃海道 平山郡積岩面 新畓里)에서 부친대근(大根)의 3남3녀중 차남으로 태어난 서성환회장은 개성에서 형 건환(建煥)과 같이 잡화상 창성상회(昌成商創)에서 일하게 되는데 이때 그는 화장품에 대한 깊은 관심과 호기심을 가졌던 것이 오늘의 대 태평양을 일구워 낸 계기가 된다.



화장품 제조에 꿈을 가졌던 그는 8.15해방을 맞아 드디어 「메로디」라는 상품명으로 크림, 포마드 등을 생산히여 시판함에 따라 오늘의 태평양은 우리민족의 우렁찬 기쁨의 함성인 8.15해방과 함께 태어난다.



1945년 9윌 5일, 이날이 바로 태평양이 창립된 날이다. 태평양이 더 큰 회사로 비약하기 위해선 개성(開城)은 좁았다.



1948년에 무대를 서울로 옮겨 훗날 태평양 바다 만큼이나 넓고 큰 회사가 되겠다는 의욕으로 「태평양화학공업사」(주, 태평양으로 개칭됨)라는 회사이름아래 온갖 심혈을 기울여 서울에서의 첫 제품인A.B. C 포마드가 탄생하게 된다.



지금도 우리들 기억속에 생생한 ABC포마드는 그 당시로서는 품질과 유통면에서 한발 앞선 최고의 제품이었다. 원료와 향을 최고품으로 사용했고 광물성이 아닌 식물성이었으며 용기도 개선해서 흰병을 사용하는 등 품질개선에 최역점을 두었고 유통에서는 전국적으로 판매조직이 잘 형성되어 있는 남대문시장 소재 태양상사(太陽商社)가 전적으로 맡아서 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제품은 생산되기가 무섭게 팔렸고 그당시 종업원30명선으로는 밀려드는 주문에 제품생산을 감당할수없어 5배로 증원을 했어도 힘든 지경이었다. 또 태평양은 앞으로 품질개선과 신제품 개발없이는 회사가 성장할수 없다고 그때에 이미 예견하고 인재육성과 연구 및 개발부 강화의 일환으로 일본인 공장에서 화장품을 생산히여 경험이 풍부한 구용섭(丘聳燮)을 고문으로 맞아들이고 서울대 약대생인 박우창(朴愚昌:전태평양장업사장)과 서울약대장학생인 오원식(吳元植:태평양개발담당부사장)을 실험실 인구원으로 채용하여 개발부를 보강했다.



우리는 여기서 태평양이 그때부터 얼마나 품질개선과 유통에 심혈을 기울였는가를 엿볼수있는 대목이며 오늘의 태평양은 그냥 이룩된 것이 아니라 태동기부터 선견적인 식견과 통찰력에 의해 이루워졌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또한 하나의 제품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제품의 우수성과 유통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현재의 장업계 종사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태평양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1957년에는 오스카 브랜드를 개발하여 도매상이나 이미용업소에 직접 공급하던 유통방식에서 벗어나 우리나라장업계 최초로 체인스토아 형식인 특약점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영업 조직을 가일층 강화했다. 거래처의 체인화는 당시로서는 가히 유통 구조의 혁명이었으며 마켓팅 전문가들도 경탄하여 대학교 교과서에까지 소개되기도 했다.



태평양은 계속해서 1959년 9월에는 프랑스 코티사와 기술제휴하여 저 유명한 코티분백분을 생산함으로써 태평양을 오늘의 반석위에 올려놓는 결정적인 계기가되었고 한국 장업계에는 품질혁신의 기폭제가 되어 국내 화장품의 품질을 한단계 향상시켰다. 이런점에서 태평양이 한국장업 발전에 끼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고 생각되며 이런 모든것들이 초석이 되어 오늘날 세계 장업사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당당한 경쟁을 할수있다고하겠다.



1960년대 초반의 한국장업계는 5.16혁명정부가 「특정외래품 판매금지법」을 제정하여 외래품과 부정품에 대해 강력한 행정력을 발동한데 힘입어 유력한 메이커들이 속속 새로 등장하게 되었고 회사마다 판매전이 치일하게 전개되어 특매경쟁, 난매 등으로 유통시장이 극도로 문란한때였다. 이런상황에서 태평양은 또다시 대 변화를 시도한다.



1965년 그 이름도 유명한 「아모레」브랜드의 개발과 동시에 유통에서 또한번의 혁명이라 할수있는 `빙문판매`로 대 전환을 하게되는데 아직도 우리들 기억속에 생생한 아모레 사원들의 단정한 유니폼과 밝은 미소가 지금으로부터 30여년전에 탄생되었던것이다.



방문판매 초창기엔 외상 매출금이 급격이 증가히여 막대한 자금 압박과 다소의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태평양은 모든것을 감수하면서 아모레 방문판매 조직을 더욱 확대해 나갔다.



아모레 방문판매를 통해 모조제품 공급을 막을수 있었고 직원들이 완벽한 상품지식을 갖추게하여 고객 서비스에도 만전을 기해 고객과 아모레 직원간에는 깊은 유대관계가 형성되었으며 회사는 제품가격을 정가대로 받을수 있어 좋았고 고객은 철저한 서비스 보장을 받으면서 대금도 후불 할수있어 좋았다.



태평양은 또한번의 유통혁명이었던 아모레 방문판매 시도로 오늘의 태평양 성장에 결정적인 디딤돌이 되었던것이다. 이무렵 태평양은 한국장업 시장의 70%이상을 점유하고 있었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해외제품들과 경쟁에서 이길수있다는 제품력의 확신으로 해외로 눈길을 돌려 수출시장 개척에 박차를 가하게된다.



드디어 1971년, 태국에 8천5백48불 상당의 LC를 받아 수출에 성공함으로써 국산화장품의 감격적인 수출 1호를 기록하여 태평양 제품이 세계인의 화장품으로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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