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가을호]우리 전통 화장 용기
[2011.가을호]우리 전통 화장 용기
  • 이지선 코리아나 화장박물관 학예연구사
  • 승인 2011.11.07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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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따라 개성있게 꽃핀 화장문화, 그 기반엔 걸출한 화장용기가

 
전 세계 여성들이 한국의 화장문화에 주목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과 일본은 물론, 동남아와 유럽에까지 한국 화장문화의 영향력은 날로 커가고 있다. 외국인들은 한국 여성들이 쓰는 화장품을 다량 구매하고 있으며, 투명화장·자연 미인을 만드는 화장법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세계 유수의 화장품회사들은 화장에 관한 한국 여성의 정보력과 전문성을 믿고 제품 생산 결정 여부를 판단한다고 하니 우리나라 화장문화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알 것 같다.

세계 화장산업을 이끌고 있는 우리나라 화장문화의 바탕에는 자연주의를 추구하며 아름다움을 가꿨던 옛 여인들의 지혜가 그대로 녹아 들어 있다. 우리 전통 화장문화를 통해 옛 여인들의 지혜를 배워보는 기회를 마련해 보았다.

시대상 반영한 고유 화장문화 개화
고대 한반도에 살았던 우리 선조의 생활 모습을 수록한 ‘삼국지 위지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專)’에 따르면, 읍루(婁)사람들은 얼굴과 몸에 돼지기름을 발랐다고 한다. 이것은 현대의 크림과 같은 기능으로 겨울철 북쪽 지방의 차가운 바람으로부터 동상을 예방하고, 여름철 뜨거운 햇볕에 피부가 손상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쓰였다.

자연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시작된 화장은 점차 아름다움을 위한 목적으로 바뀌게 되었고 고유한 화장문화도 생겨났다.

섬세하고 사실적인 묘사가 일품인 고구려(BC 37-668)의 고분벽화에는 가느다란 눈썹과 붉은 연지를 바른 여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일본의 옛 문헌인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1715)’에는 백제(BC 18-660)의 승려가 일본인들에게 연지(脂) 제조기술을 전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신라(BC 57-668)인들은 아름다운 육체에 아름다운 정신이 깃든다고 여겨 청결한 몸과 치장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후 통일신라시대 화장문화는 삼국(三國)의 화장문화와 당(唐)·서역(西域)의 것이 융합하여 더욱 번성했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시대(BC 57-668)와 통일신라시대(676-935)에 걸쳐 우리나라의 화장문화 및 화장품 제조기술의 수준이 상당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통일신라의 화장문화는 고려(918-1392)로 그대로 이어졌다.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던 고려시대는 화장용기와 도구의 발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수준 높은 고려자기 제작기술은 다양하고 화려한 화장용기를 만들 수 있는 토대가 되었고, 뛰어난 거울 제작기술은 견고하고 성능 좋은 고려경(高麗鏡)을 만들어 거울을 쓸 수 있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고려 여성들은 신분과 상황에 맞는 다양한 화장법을 행했으며, 사람들은 항상 향(香)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점차 화려해지던 화장문화는 조선(1392-1910)으로 접어들면서 바뀌게 된다. 검소하고 실리를 강조하던 유교윤리에 따라 외면의 아름다움보다는 내면을 가꾸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화장을 즐기지 않았고, 나들이 때나 잔치가 있을 때만 은은하고 수수한 화장을 했다. 

화장품은 대부분 직접 만들어 썼는데, 모두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꽃, 열매, 잎사귀 등의 자연 재료를 사용했다.

특히, 한국의 여인들은 깨끗하고 부드러운 얼굴 모습과 단정한 몸가짐을 미덕으로 삼았기 때문에, 세정제(洗淨劑)와 화장유(化粧油) 같은 기초화장품과 분(粉)·연지·눈썹먹[眉墨] 같은 색조화장품을 만들기 위해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이렇듯 삼국시대 이전부터 지속한 우리나라 화장문화의 중심에는 화장품을 담던 용기가 있었다. 화장용기는 시대별 특성에 맞게 다양한 재질로 제작되었고, 화장 재료의 특성을 고려해 각각의 종류와 특성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등장하였다.

그윽한 향기 병 속에 가득한데…
유병(油餠)

 
유병이란 향유(香油)와 머릿기름, 미안수(美顔水) 등 주로 액체 형태의 화장품을 담는 용기이다.

옛 여인들은 식물의 씨앗에서 추출한 기름을 사용해 피부를 가꿨다. 살구씨와 복숭아씨 기름으로 기미와 주근깨를 제거하여 깨끗한 피부를 만들고, 필수지방산과 비타민E가 풍부한 홍화씨 기름으로 피부를 촉촉하고 윤기나게 했다. 또, 피부의 수분 공급을 위해 수세미·오이·수박 등 수분이 많은 식물에서 채집한 즙인 미안수를 사용했다. 

유병의 형태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이긴 했지만, 주로 내용물에 따라 크기와 모양이 조금씩 다른 것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향유나 향수처럼 향을 보존해야 하는 경우에는 크기가 작고 입구가 좁은 유병을 썼고, 한 번에 많은 양을 쓰는 머릿기름은 입구가 넓고 큰 유병에 담았다. 내용물이 증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유병에 뚜껑을 덮거나 종이와 헝겊으로 병 입구를 막아 사용했다.

유병은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드는 다른 화장용기와 달리 대부분 흙으로 구운 도자기를 사용했다. 이는 온도와 습도에 민감한 내용물의 특성을 반영하여 재료가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자연의 빛깔을 담다
분합(粉盒)

 
분합은 납작한 형태에 넓은 뚜껑이 있는 그릇으로 유병과 더불어 화장용기 중 사용 빈도와 중요도가 가장 높다. 분합에는 가루 형태의 화장품인 백분(白粉)과 가루비누(세정제) 등을 담았다. 때때로 향을 담아 향합(香盒)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분은 하얀 피부로 가꿀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화장재료로 크게 미분(米粉)과 연분(鉛粉)으로 나뉜다.
미분은 쌀이나 분꽃씨를 가루로 만든 것으로 백분으로도 불렸다. 한국의 옛 여인들은 이 미분에 황토, 조, 칡뿌리 가루처럼 색분을 섞어 자신의 얼굴빛에 맞는 분을 만들어 썼다. 과도하게 흰 얼굴보다 자연스러운 얼굴빛이 더 아름답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미분은 부착력과 퍼짐이 약해 물이나 기름에 개어 발라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반면 연분은 납 성분이 포함된 분으로 미분보다 부착력이 뛰어나고 사용 방법이 간편해 많이 사용됐지만, 납 중독으로 말미암아 피부에 여러 가지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했다.

깨끗한 피부를 만들기 위해서 분과 함께 사용한 것이 조두(豆)이다. 조두는 녹두·콩·팥을 갈아 만든 가루비누로 비누가 없던 시절 묵은 때를 씻어내기 위해 물에 풀어 썼던 세정제다.

분합은 삼국시대 도기에서부터 나타나며 고려청자를 거쳐 조선시대의 분청자 및 백자에 이르기까지 많이 만들어졌다.

도자기로 만든 것이 가장 일반적이지만, 유병과는 달리 나무·금속·돌 등으로 만든 것도 있다.

분합에 보관하는 화장품은 수분이 없어 상대적으로 화학적 변화가 덜한 것들이었다.

다만, 뚜껑이 열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몸체와 뚜껑이 잘 맞물리게 하였다.

분합의 형태는 원형이 많고 뚜껑에 볼록한 꼭지가 있어 여닫기 편하게 한 것도 있다. 분합은 입구가 넓어 안에 있는 내용물을 덜어내기 쉬웠고, 뚜껑은 접시처럼 사용할 수도 있었다.

고운 얼굴, 꽃보다 더욱 곱구나
분항아리[粉壺]

 
분항아리는 분합과 함께 백분이나 연지·눈썹먹 등을 담아 놓기 위해 만든 작고 오목한 그릇이다.

연지는 볼과 입술에 발랐던 붉은 색조화장품을 일컫는다. 연지는 홍화(紅花)에서 붉은 염료를 추출해 만드는데, 재료가 귀하여 쉽게 구할 수 없는 고가의 화장품이었다. 가루 또는 환 형태로 만들어 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기름에 조금씩 개어서 사용했다.

일반적으로 눈썹화장은 목탄을 사용했으나 상류층 여성들은 눈썹먹을 기름에 개어서 쓰기도 했다.

먹은 식물을 태운 재·그을음[墨]으로 만들었고, 청대(靑黛)라 하여 쪽[藍] 염료로 만든 것도 있었다. 재료에 따라 검은색, 검푸른 색, 짙은 밤색 등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분항아리는 여성의 손이나 경대 서랍에 쏙 들어갈 정도의 작은 크기로, 생활 도자기를 축소해 놓은 모양이다. 둥그런 형태가 많지만, 사각·육각·팔각의 것도 있다. 분합과 달리 뚜껑 없이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며, 뚜껑이 있어도 입구만 덮을 정도로 작다. 또한, 입구가 좁아 내용물이 쉽게 덜어지지 않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작은 숟가락이 달려 있기도 하다.

분항아리는 담아 놓는 화장품의 종류에 따라 분호(粉壺), 연지호(脂壺), 향호(香壺)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희고 화사한 피부를 위하여
분접시(粉匙)와 분수기(粉水器)

 
앞서 소개한 화장용기가 화장품 보관을 위한 것이었다면, 분접시와 분수기는 화장을 할 때 쓰는 그릇이다. 

분접시는 분말이나 고체 상태의 화장 재료를 갤 때 꼭 필요한 용기로 분과 연지를 덜어 놓고 물이나 기름에 개어 얼굴에 바르기 쉽게 해준다. 원형·다각형·화형 등 다양한 형태가 전해진다.

분수기는 물을 담아 놓고 사용하던 용기로 분가루에 적정량의 물을 떨어뜨릴 수 있게 한다. 용도와 형태는 연적(硯滴)과 비슷하나 크기가 훨씬 작다.

조선 말기 우리나라 백자를 연구한 일본인 학자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는 자신의 저서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名考, 1931)’에 분수기의 지름은 보통 4.5㎝ 미만 내외 정도라고 기록하여 연적과 구분하였다.
분수기는 다른 형태의 화장용기와 달리 백자청화로 제작된 것만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이후부터 사용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우리 전통 화장용기를 직접 보고 싶다면 박물관으로 가면 된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역 근처에 있는 코리아나 화장박물관은 우리나라에서 화장문화와 관련된 유물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이다.

박물관에 전시된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다양한 화장용기를 보고 있노라면 화장용기가 지닌 매력과 다양성을 만나게 된다. 마치 이 작은 화장용기 속에 대자연이 담겨 있는 듯, 섬세한 여인의 손길로부터 온기가 전해지는 듯 현대의 화장품 용기에선 발견할 수 없는 숨결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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